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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부정공>귀두량사기(龜頭涼榭記)휘병두(諱秉斗)
龜頭涼榭記(諱秉斗) 夫宦遊者歸而欲其燕息讀書者隱而思其藏修往往有別業凡今古所在亭榭之播詠於鴻匠麗藻之間者是己第余非宦遊者亦非讀書者燕息藏修無處不宜而且先人舊廬足以攸芋攸寧奚別業爲哉顧吾家傳業頗世裕自先祖父以來鄉邦間莫不以睦恤慈善見推逮至不肖雖不敢爲大荒嬉而委靡至于不振族戚之賙賓客之奉僮僕之御每患不足於是乎瞿瞿焉思所以扶傾補敗之道勵精治生乃先從稼穡始非自我親耒耟而驗耕播之候匪自我躬襏襆而審灌溉之宜以不違時爲當務是以往來畎畝之際有休憩之所所謂龜頭亭者是也而其下即吾玉川氏世庄在距家數候地盖漕溪山一旒百回起伏十里廷袤勢若將北走忽爲廣清洪濤所抑遏遂東轉迤邐兀然一拳陟立平野環而顧之如曳尾泥龜欲出水曝曬趾拏攫背穹隆首至此而蜿蜿南回有若造物者準擬謄待之巧設而奇置矣兼有巨石蹲踞左右古木竹樹蓊蔚葱篟襟帶長川面撫前野乙亥春築一涼榭其制也雖儉小視笠樣而可有餘厲比鳥革而亦不遊每農月農者畢出遂登臨眺望則歡愉艱難盡在眼前若躬親焉日與田翁野老所相與稱慶者惟黍稷稻梁至於漁樵喚侶碁酒留賓風月得句乃傍及之餘事然吾之惓惓於斯豈尋常宦遊讀書者別業之比耶昔周公以成王未知稼穡艱難作豳詩一篇使朝夕諷誦而敎之嗚呼帝王家猶然况編户匹庶乎因記築榭本義留作家少輩鑑攷云 趙石汀敬文請余作龜頭涼榭記其言曰此吾宗處士君秉斗觀稼休憩之所也君以通才績學考友行於家信義著於鄉其他施設皆可爲法而沈淪草茅世無知者其人己沒其亭幸存以吾之辱交於子豈可無子之一言而處士抑有待於今日也余聞趙氏居順天之龜湖村自高麗典農寺副正諱瑜諡節愍公諱崇文以來爲郡著姓處士家素裕世以慈善喜施爲鄉里所推處士既率其道祭祀賓客婚姻贈遺無所闕而計一歲之入寝不足矣大懼業之將墜思所以振興之有遺田若干畝在湖上乃躬幹稼穡課僮奴諭佃夫耕耨以時灌溉得宜人功既至歲獲常稔卒以復振夫學與產業常相違務學而不作業則失於養生作業而不務學則闇於大道二者盖兼之難也若處士產既更饒學又不廢玆非有過人之資而能然乎哉然余窃歎夫處士窮而在下獨其道行於家而不得試之於國也處士生 哲宗太皇之際是時朝廷之上雖朋黨角立閥閱官人外戚執命婦寺預政貨賂公行僥倖多門毒民病國者非止一二然而滄海晏流金甌無缺殆未雨綢繆之日也顧無一介臣弊將修之傾將扶之如處士之爲者則我韓展轉卒以至於亡悲夫余未登龜頭之亭覽處士規畫艱難之遺跡而後之爲家國圖興復者未有不來取法焉事雖小可以喻大者此也石汀其以余言吿處士之子孫涼榭之存不徒爲趙氏幸尚克永世勿替也築榭之年月山川之面勢處士己自記之詳故不復贅姑以余所感於中者書之以爲涼榭後記 開城 王性淳 記 文侍講 귀두량사기(龜頭涼榭記) 대범 벼슬길에 노는 자는 돌아가서 편안히 쉬고자 하고 글 읽는 자는 숨어서 갈고 닦기를 생각하여 별장을 두었으니, 무릇 고금(古今)에 있어서 정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훌륭한 시인들을 통하여서였다. 다만 나는 벼슬길에 놀던 자도 아니요, 또 글 읽는 자도 아니라 편안히 쉬고 갈고 닦기가 마땅하지 아니한 곳이 없고 또 선인(先考)의 옛집이 크고 편안하니 어찌 별장이 있을 것인가. 돌아보건대, 우리집에 전해온 가산이 자못 대대로 넉넉하여 선조부(先祖父) 이래로 나라와 고을 사이에서 화목하고 기민을 구호하며 자선하여 무겁게 보지 아니함이 없었는데, 불초에 이르러 비록 감히 거칠게 놀지 아니하였으나 버리고 쓰러져 떨치지 못하게 되어 촉척의 구제와 빈객의 접대며 노복의 거느림이 매양 부족하므로 두려워하여 기울어진 것을 세울 도리를 생각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가업을 다스리는데, 먼저 씨를 뿌리고 거두어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몸소 쟁기를 잡지 않으나 갈고 뿌릴 때를 살피곤 내가 몸소 도롱이를 입지는 않으나 물 대고 빼는 시기를 짐작하여 때를 어기지 않음으로써 일과를 삼으니 밭두렁 사이에 왕래하며 휴식(休息)할 장소를 둔 것이 이른바 이 귀두정(龜頭亭)이다. 그 아래가 곧 우리 옥천 조 씨가 대대로 사는 터요, 집에서 두어 과녘거리로 조계산 산봉우리가 백 번이나 일어났다 엎어졌다 十리를 내리뻗어 형세가 장차 북으로 달릴 것같이 하다가 문득 광청 큰 물결에 막힌바 되어 마침내 동쪽으로 굴러 뻗곤 높은 한 주먹이 평야에 엎드려 서니 둘레를 돌아보면 진흙 거북이 꼬리를 끌고 물에서 나와 햇볕을 쬐어 말리고자 발꿈치로 끌어당기고 등을 움키며 높은 머리를 덮은 것같이 하고 이에 이르러 굼틀거려 남으로 돌아 조물자(造物者)의 높이 비겨 등대한 기교한 시설이 있는 것 같고 겸하여 큰 돌이 움직거려 춤추듯 걸터앉아 좌우에 고목과 대나무가 우거져 푸르르며 긴 냇물을 옷섶띠로 하고 앞들을 어루만진다. 을해년 봄에 한 서늘한 정자를 지으니 비록 그 규모가 검소하여 작은 삿갓 모양으로 보이긴 하나 가히 남은 처마(厲比)가 있어 새가 날개를 펴도 사양하지 아니할 만하였다. 매양 농삿달에 농부가 전부 들에 나오면 정자에 올라가 바라보고 바라본즉 즐겁고 어려움이 다 눈 앞에 있어 몸소 당한 것 같았다. 날로 농부와 더불어 서로 환담한 것은 오직 백곡의 풍년들기를 바람이요, 고기 잡고 나무한 벗을 부르고 바둑과 술로 손님을 만류하며 풍월로 詩句를 얻는 것은 그 밖의 일이었다. 그런즉 내가 이에 정성을 드린 것이 어찌 심상한 벼슬하고 책 읽는 자의 별장에 비하겠는가. 옛적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이 농사하는 어려움을 모른다 하여 빈(豳, 中國陝西省) 시 한 편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비유하여 간하고 외게 하였다. 아! 제왕가(帝王家)에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편호(編户)의 서민이겠는가. 여기 정자를 지은 근본 뜻을 기록하여 집안 젊은 사람들의 귀감을 만드노라. 조석정 경문(趙石汀敬文)이 나를 보고 귀두량사기를 쓰라 하며 말하되, 「이는 우리 종당 처사군 병두(秉斗)가 농사를 보며 휴식한 곳이요, 또 군은 통달한 재주와 학문으로 효도와 우애를 집안에 행하고 믿음과 의리를 고을에 나타내며 기타 다 가히 본받을 만하였으나 시골에 묻혀 세상에 아는 이가 없고, 사람은 이미 떠났으나 그 정자는 다행히 서 있으니 나의 고마운 친교인 자네이매 어찌 가히 한 말이 없으리요, 처사는 오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하였다. 내가 들으니 순천의 귀호마을에 사는데 고려 전농시 부정유(高麗典農寺副正諱瑜)로부터 숭문(崇文) 이래로 군내의 명문 거족이요, 처사의 집이 본디 부유(富裕)하여 대대로 자선으로써 시여(施與)를 좋아하니 향리의 흠앙한바 되었고, 처사도 그 도리를 본받아 제사·빈객혼인에 은혜로 빠진데 없이 증여하니, 一년의 수입으로도 부족한지라 가산이 점차 기울어질까 염려하고 진흥할 바를 생각하여 호상(湖上)에 있는 약간의 이랑과 거친 땅을 가지고 이에 몸소 씨를 뿌리고 거두기를 간검하게 하고, 노복(奴僕)을 단속하며 농부에게 일러 때를 맞추어 갈고 매며 적기에 물을 대고 빼어 정성이 지극하니 수확이 풍요하며 마침내 다시 진흥되었다. 대범 학문과 산업은 서로 틀리나 학문에만 힘쓰고 산업을 다스리지 아니하면 생활을 할 수가 없고 산업만 알고 배우지 아니하면 대도(大道)에 어두운 것이니, 두 가지를 다 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처사는 산업이 다시 풍요해지고도 학문을 폐하지 않았으니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바탕이 아니면 능히 그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처사가 시골에 궁거하여 홀로 그 도를 가정에 행하고 나라에 시험하지 못함을 한탄할 뿐이다. 처사가 철종(哲宗)과 태황(太皇)의 사이에 출생하니 이때 나라에 당파가 심하여 족벌 관료와 외척이 권력을 잡고 내시가 정사에 관여하며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요행을 바라는 자가 많아,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병들게 한 자가 한둘이 아니로다. 그러나 푸른 바다는 편안히 흐르고 금사발은 이즈러짐이 없으니 자못 뿌리지 말고 단결할 때로다. 돌아보건대 한 명의 신하도 떨어진 것을 수리하고 기울어지는 것을 붙잡아 처사와 같이 한 자가 없은즉 우리 한국은 궁구러져 마침내 망하게 될 터이니 슬프도다. 내가 귀두정에 올라 처사의 경획(經書) 어렵고 어려운 남긴 자취를 보지는 못했으나 뒤에 나라를 위하여 흥복(興復)을 도모하는 자는 와서 법을 취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일이 비록 작으나 가히 크게 비유함이 이것이로다. 석정(石汀)이 내게 말하되, 「처사의 자손이 양사(涼榭)를 보존한 것이 한갓 조 씨를 위하여 다행한 것이 아니니 능히 영세토록 변치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정자를 건축한 연·월·일과 산천의 형세는 처사가 이미 자상히 기록하였는 고로 다시 더하지 않고 아직 나의 마음에 감동된 바를 써서 양사후기(涼榭後記)를 삼는다. 개성(開城) 왕성순(王性淳) 기(記) 문시강(文侍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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